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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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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전문] 신동규(국제대학 일본학과 교수) 동아대학교 역사인문이미지연구소 소장


신동규(국제대학 일본학과 교수) 동아대학교 역사인문이미지연구소 소장은 일제강점기 시각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분석해 공개하는 데이터베이스(DB) 구축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24일 부산 서구 동아대 부민캠퍼스 연구실에서 만난 신 소장과의 인터뷰 전문을 싣는다.


■신동규(申東珪)

-직위: 교수

-학과 소속: 국제대학 일본학과

-현 직책: 국제전문대학원 원장 겸 국제대학 학장. 역사인문이미지연구소 소장.



▶임훈(이하 임): 교수님께서 일본학 연구에서 출발해 일제강점기 시각자료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 신동규 소장(이하 신): 초등학교 5학년 시절부터 우표와 크리스마스 씰을 수집하던 취미가 실제 사용 우편물과 사진그림엽서로 확장되면서 일제강점기 시각 자료에 깊은 흥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미지 자료에는 사라진 근대 유적과 거리, 당시 사람들의 삶,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성된 각종 수치와 통계가 생생히 박제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각적 기록들이 주는 강렬한 호기심이 역사학자의 길로 들어선 가장 큰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수집 범위를 고서 사진첩 팸플릿 고지도 등으로 넓혀왔는데, 어느덧 수집 인생도 50여 년에 가까워졌습니다. 비록 아픈 역사의 흔적일지라도 실증적인 역사 정립을 위해 소중하지 않은 자료는 없다는 신념으로 지금도 수집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다만, 종이 매체 특성상 자료가 손상될 위험이 크기에, 지금은 이를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누구나 공유할 수 있도록 데이터베이스(DB)화하는 시스템 구축에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임: 연구소가 추진하고 있는 ‘일제강점기 한국 관련 팸플릿의 분석·번역·해제·이미지 DB 구축 사업’의 핵심 목표는 무엇인가요?


-신: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문헌 중심의 이론적 연구를 넘어 당대의 이미지 자료를 통해 더욱 실증적인 역사·문화상을 복원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료의 공유입니다. 개인이 수집한 희귀한 학술 자료나 학계 미발견 자료라도 소장가의 손에서 사장되지 않도록 DB로 구축하여 공개함으로써 학술적·사회적 효용성을 극대화하여 학술 연구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임: 최근 연이어 발간한 학술총서는 누구와 어떻게 작업하셨고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앞으로 어떻게 마무리할 생각인가요?


-신: 최근 저를 비롯한 소속 연구원이 함께 총 6권의 총서를 발간했습니다. 특히, 2025년 11월에 일제강점기 팸플릿을 대상으로 삼아 ‘일제강점기 한국 관련 프로파간다 팸플릿: 경성을 가다’(소책자 편, 리플릿 편)라는 제목의 번역서 두 권을 출판했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근대 일본어로 작성되어 번역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다만, 번역에 상상 이외의 시간이 많이 투입되어 이것이 가장 애로 사항이었다고 생각됩니다. 2026년에는 일제강점기 금강산 팸플릿과 ‘조감도(한반도와 각 지역을 하늘에서 바라본 그림지도)’라는 주제로 각기 연구서를 출판할 계획입니다. 현재, 제가 연구책임자가 되어 추진하고 있는 ‘일제강점기 한국 관련 팸플릿의 분석·번역·해제·이미지 DB 구축’(한국연구재단 지원)이라는 연구가 2030년 8월에 마무리 되는데, 그때까지 10권의 총서를 더 완성할 계획입니다. 또한 ‘일제강점기 한국 관련 팸플릿 DB’는 현재 시스템까지 완전히 구축해 놓은 상태입니다만, 이미지·번역문·해제 등을 포함한 모든 메타데이터 자료들을 입력해 모든 관련 연구자나 일반인들이 편리하게 검색하여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연구 종료와 함께 공개할 예정입니다.



▶임: 이 사업을 추진하고 국가사업으로 확정되는 과정이 녹록치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신: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근대 한국 관련 사진첩’으로 DB 구축 사업을 신청했으나, 매번 최종 면접에서 낙방하여 마지막에 그간 수집한 2000여 점의 일제강점기 팸플릿으로 계획을 변경해 2024년 9월 최종 선정되었습니다. 더군다나, 한국에서 팸플릿을 연구한 학자들이 거의 없고, 소장한 기관도 거의 없는 상태였기에 계획서를 작성하는 단계에서부터 마무리 단계까지 작업을 홀로 감당하다 보니 무척 고된 작업이었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관련 전공 분야의 공동연구원과 전임연구원들이 연구를 효율적으로 추진해 주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임: 동아대학교 역사인문이미지연구소를 소개해 주세요. ‘인문이미지학’이라는 연구 개념은 무엇이며 기존 역사 연구와 어떤 차별성이 있습니까?


-신 : 우리 연구소는 2019년 5월, 근대 한국과 동북아시아의 이미지 자료를 체계적으로 수집·분석하여 새로운 인문학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설립되었습니다. 핵심 개념인 ‘인문이미지학’은 기존의 문헌 중심 연구 방법론에서 과감히 탈피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과거에는 각종 시각 자료가 텍스트를 보조하거나 부수적인 참고 자료로만 활용되었습니다만, ‘인문이미지학’은 이미지 그 자체를 독립적인 주된 사료(史料)로 격상시켜 이를 역사적으로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즉, 단순히 그림이나 사진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속에 투영된 인간의 삶과 사고, 권력의 의도를 파악하여 역사적 변화와 사회 현상을 탐구하는 것입니다. 조금 강조하자면, ‘보이는 사실’과 ‘보이지 않는 역사’를 통해 보다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역사관을 구축하는 것이 ‘인문이미지학’의 목적이자, 기존 연구와의 가장 큰 차별점입니다. 우리 연구소는 이 새로운 방법론을 통해 학문의 외연을 넓히고 실증적인 연구 체계를 확립해 나갈 것입니다.



▶임: 교수님은 일제강점기 팸플릿과 엽서를 ‘보이는 권력’의 산물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당시 시각 매체가 식민지 통치에서 어떤 역할을 했다고 보십니까?


-신: 근대 시각 매체의 핵심은 권력 주체의 의도를 전파하는 프로파간다(Propaganda)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일제강점기 팸플릿과 엽서는 시기에 따라 그 역할을 달리하며 식민 지배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도구로 쓰였습니다.

먼저 시기별 역할을 보면, 한국병합 이전에는 침탈의 당위성을 선전하고 저항 없는 병합을 유도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는데, 병합 이후에는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고, 이른바 ‘시혜적인 근대화’를 선전하는 매체로 활용되었습니다.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나 1929년 조선박람회 같은 대규모 전시회 인쇄물들이 대표적입니다. 1930년대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에 돌입해서는 내선일체와 황국신민화 교육, 그리고 인적·물적 자원을 강제 동원하기 위한 선동 매체로서 그 역할이 더욱 노골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시각 매체는 발행 주체에 따라서 ‘관제(官製)’와 ‘사제(私製)’로 나눌 수 있습니다. 관제 자료는 조선총독부, 철도국 및 각 행정 단위(도·부·군 등)에서 발행한 것으로 공적 행정 지침과 정책 홍보가 주를 이루고, 사제 자료는 기업, 단체, 개인 등이 경제적 이익이나 홍보를 목적으로 발행한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사제 자료라고 해서 정치적 프로파간다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일제강점기 자료의 특징이기도 합니다만, 당시 민간 기업이나 관변 단체들 역시 자신들의 실리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제의 식민 정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합리화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결국 관제와 사제를 막론하고, 당시의 시각 매체는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담론을 생산하고 유포하는 거대한 ‘시각적 통치 네트워크’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른 나라와는 다른 일제강점기 이미지 관련 인쇄물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임: 교수님이 수집한 약 5만여 장의 사진그림엽서 가운데 가장 상징적이거나 충격적이었던 자료는 무엇이었습니까?


-신: 독립운동가들의 교수형 모습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처단한 후에 발행한 엽서, 그리고 1910년 한국병합을 일본이 기념한 엽서입니다.

1909년 무렵 독립운동가들을 일본군이 교수형에 처한 사진그림엽서가 있는데, 엽서의 캡션에는 죄수들의 교수형이라고 기재되어 있지만, 실은 1909년 독립운동가들을 색출하면서 이른바 ‘남한대토벌’이라고 하여 당시 무자비하게 살상을 가한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단순한 형 집행 장면을 넘어, 당시 일제가 의병 세력을 도적이나 강도 등의 범죄자로 격하시키려 했던 선전 도구로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는 안중근 의사가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순국하신 이후에 제작된 것인데, 왼쪽 약지를 단지한 안중근 의사의 모습과 히로부미의 초상, 하얼빈역에서 히로부미가 저격당한 장소, 그리고 저격할 때의 총을 디자인한 엽서인데, 안중근 의사를 자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를 볼 때 마다 역사의 아픔뿐만 아니라, 제 개인의 사사로움에 대해 늘 반성을 하게 됩니다.

끝으로 한국병합 기념엽서인데, 한국병합에 관계된 인물을 소재로 제작한 2매 연쇄의 파노라마 엽서입니다.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금색의 국화 문양에 둘러싸인 메이지천황 밑에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초상을 아주 작게 도안하였고, 천황의 좌측에서부터 우측 끝으로 고대 ‘삼한정벌’ 설화의 주인공 진구황후(神功皇后)→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조선침략)→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정한론 주장)→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초대 통감)→1910년 8월 22일에 이른바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초대 총독)와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친일파 이완용을 연이어 도안하고 있습니다. 진구황후가 처음부터 도안되어 있다는 것은 소위 ‘삼한정벌’이라는 왜곡된 역사가 일본인들의 한국관에 강렬히 뿌리내려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조선을 침략한 도요토미와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한 사이고가 뒤를 이어 도안되고 있다는 것은 한국이 단순한 침략의 대상이 아니라 역사적 필연성에 의한 복속 대상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러한 측면에서 일본인의 한국관에 대한 뿌리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완용 도안을 삽입함으로써 한국병합은 한국인이 원했던 결과였고, 강제적이 아니었음을 합리화하기 위해 제작한 엽서였던 것입니다.



▶임: 연구소가 구축한 이미지 데이터베이스(DB)는 학계뿐만 아니라 교육·전시·예술 창작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어떤 활용 방법이 있을까요?


-신: 질문하신 활용 방안에 앞서, 현재 추진 중인 팸플릿 DB 구축 사업이 갖는 독보적인 가치를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연구소가 DB로 구축하는 이미지 자료들은 국내외 주요 박물관이나 도서관에서도 소장하지 못한 미발견 희귀 자료가 대부분입니다. 그간 ‘고가 수집품’으로만 머물렀던 이 1급 사료들을 디지털화하는 것은 종이 자료의 망실을 막는 ‘영구 보존’의 의미가 큽니다. 특히, 연구책임자인 제가 이미 모든 자료를 소장하고 있어 타 기관과의 협의나 저작권 분쟁 없이 즉각적이고 경제적인 DB 구축이 가능하다는 점은 우리 연구소만의 압도적인 강점입니다. 이렇게 구축된 이미지 DB의 구체적 활용 방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광범위한 학술 연구의 실증 자료로 활용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 사상 군사 관광 건축 예술 등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한 사진과 텍스트 정보는 일제강점기 연구의 파급력을 높일 것입니다. 특히, 팸플릿에 남은 옛 건축물 사진과 설명은 문화재청의 복원 사업이나 사라진 유·무형 문화유산을 재건하는 데 결정적인 근거가 됩니다.

둘째, 공공 교육 및 전시 콘텐츠로서의 가치입니다. 박물관에서도 보기 힘든 희귀 사료를 온라인에 공개함으로써 학교 현장에서는 살아있는 역사 교재로, 지역 사회에서는 고품격 전시 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손쉽게 검색하고 발췌할 수 있는 시스템을 통해 학문적 문턱을 낮추고 사회적 기여도를 높이고자 합니다.

셋째, AI 기술과의 결합을 통한 미래형 복원입니다. 산재한 이미지 데이터와 AI 시스템을 결합하면, 특정 구시가지나 문화재의 시대별 변화상을 정밀한 영상으로 구현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와 AI가 결합한 실증적 시대 영상 복원은 우리 연구소가 앞으로 개척해 나갈 핵심 과제이기도 합니다.



▶임: 2021년 8월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과 함께 진행한 사진그림엽서 전시는 시민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습니까? 시민 반응은 어땠나요?


-신: 당시 전시는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의 요청으로 기획되었으며, 두 가지 핵심 테마로 구성했습니다.

제1부 ‘한국병합’에서는 일제가 병합을 어떻게 기념하고 미화했는지, 그 화려한 이미지 이면에 숨겨진 침략의 의도를 폭로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이어지는 제2부 ‘조선인의 삶’에서는 일제의 수탈과 탄압 속에서도 묵묵히 이어졌던 우리 민족의 적나라하고 생생한 삶의 현장을 ‘시대적 자화상’으로서 가감 없이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특히 일본인이 제작한 엽서 속에 투영된 작위적인 우월감과 조선을 향한 내재된 멸시관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했습니다.

전시 기간 중 수많은 시민이 방문해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일제강점기의 실상을 담은 시각 자료에 대한 호응이 기대 이상이었고, 현장에서 관련 도록이나 해설서를 요청하는 목소리도 높았습니다. 다만 당시 예산과 일정상 도록을 따로 제작하지 못해 관객들에게 충분한 자료를 제공하지 못한 점이 큰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이러한 아쉬움을 바탕으로, 향후 3년 이내에 당시 전시 자료를 집대성한 책자를 발간할 계획입니다. 또한, 올해 말에는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에서 ‘한국의 크리스마스 씰-결핵 박멸과 퇴치의 역사’를 주제로 새로운 전시를 준비 중입니다. 일제강점기부터 현재에 이르는 방대한 결핵 퇴치 관련 사료를 선보일 이번 전시에서는 도록과 리플릿을 충실히 준비하여 시민들의 학술적 갈증을 해소해 드리고자 합니다.



▶임: 일제강점기 시각자료 연구가 오늘날 역사 인식이나 한일 관계 논의에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신: 가장 큰 의의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시각적 허구를 해체하는 데 있습니다. 당시 거의 모든 시각 자료는 일제에 의해 생산되었습니다. 그들이 만든 화려한 이미지와 통계는 “식민 지배가 조선을 근대화시켰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모든 정책의 수혜자는 철저히 일본 제국주의였습니다. 그들의 근대화는 조선의 발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배의 영속화와 자원 침탈을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아직도 일본 내에 잔존하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는 식의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일제가 제작한 시각 자료에 대한 비판적이고 실증적인 분석은 대단히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외에도 시각 자료 연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기록의 보완과 현장의 진실입니다. 문헌 기록은 집필자의 의도에 따라 검열되거나 미화될 수 있지만, 사진은 의도치 않은 현장의 찰나를 포착합니다. 공식 기록에서 누락된 민초들의 삶이나 파괴된 문화재의 원형, 역사적 사건의 세부 정황 등을 복원하는 데 시각 자료는 무엇보다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둘째, 제국주의 시선의 해체입니다. 일제는 조선을 미개하고 정체된 국가로 타자화하여 사진그림엽서 등에 담아냈습니다. 이러한 ‘보이는 권력’의 의도를 파헤침으로써,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수용해 온 식민주의적 사관을 시각적으로 비판하고 해체할 수 있습니다.

셋째, 역사 왜곡의 방어 기제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최근 역사 수정주의 세력이 시각 자료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유포하는 상황에서 학술적으로 정립된 이미지 분석은 대중이 역사 왜곡에 휩쓸리지 않도록 돕는 단단한 방패 역할을 할 것입니다. 결국 한 장의 이미지를 제대로 읽어내는 힘이 올바른 한일 관계 정립에도 기여하는 바가 클 것으로 생각됩니다.



▶임: 일제강점기 시각자료를 평생 연구해 온 학자로서 ‘가장 위험한 역사 왜곡’을 꼽으라면 무엇이고, 그 이유는?


-신: 시대별로 여러 왜곡이 존재하지만, 저는 단연 일본의 고대 ‘삼한정벌(神功皇后의 三韓征伐)’ 설화를 꼽습니다. 4세기 무렵 진구황후가 한반도 남부를 정벌해 200여 년간 지배했다는 이 설화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유물도, 유적도, 객관적 증거도 없는 허구의 전설에 불과합니다. 진짜 위험한 지점은 이 전설이 정사(正史)로 둔갑하여 근대 일본의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적 뿌리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일제는 이 왜곡된 인식을 근대에 교묘히 부활시켰습니다. “한국은 원래 일본의 정벌지였다.”는 논리는 임진왜란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거쳐, 메이지 유신 시기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征韓論)’으로 계승되었습니다. 결국 1910년 한국병합은 그들에게 ‘침략’이 아닌 ‘역사의 회복’이라는 궤변으로 포장되었습니다.

제가 수집한 1000여 종의 한국병합 기념엽서를 보면 진구황후,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토 히로부미가 나란히 도안되어 있습니다. 이는 일본 관료와 지식인층이 왜곡된 역사를 대중에게 시각적으로 세뇌한 결정적 증거입니다. 이를 사실로 믿게 된 일본인들에게 조선은 멸시의 대상이 되었고, 일본은 우월한 지배자로 각인되었습니다. 이러한 왜곡된 한국관은 지금도 한일 간 역사 갈등의 심연에 뿌리 깊게 남아 있습니다. 시대를 초월해 한국인과 일본인의 역사 인식을 평행선으로 만드는 근원적인 독소이기에 저는 이를 가장 위험한 역사 왜곡이라 단언합니다.



▶임: 지난 정부와 최근 일제강점기를 두고 ‘피해 서사’를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위안부, 독도문제 등에 극우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젊은층의 극우화도 일부 관찰되는데요.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고 있고 어떤 해법이 필요할까요?


-신: 최근 일부에서 제기되는 ‘피해 서사 탈피’ 주장은 본질을 전도시킨 위험한 논리입니다. 저는 이러한 현상의 근본 원인이 권력층의 뒤에 숨어 있는 왜곡된 역사 인식과 교육 시스템의 부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배경은 명확합니다. 해방 이후 일제강점기 기득권 세력이 지식인층, 교육자, 공무원 등 사회 지도층으로 고스란히 편입되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과거 청산 대신 ‘과거 지우기’를 택했습니다. 이러한 미완의 청산이 결국 ‘뉴라이트’나 ‘역사 수정주의’라는 기형적인 사고방식을 낳았고, 이것이 국가 권력과 결부되면서 지난 정권들의 외교적 패착을 초래한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10여 년 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선포된 ‘최종적·불가역적’ 합의입니다. 이는 한국의 입장을 스스로 왜곡하고 대일 외교에서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굴욕적 난국을 자초했습니다. 잘못된 역사 인식이 정권과 결탁할 때 국가의 근간이 얼마나 흔들릴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또한, 지난 정부에서 민간단체의 극우적 사상교육을 지원하고 이를 교육 시스템의 일부로 수용한 점은 매우 뼈아픈 대목입니다. 편향된 교육에 노출된 젊은 세대가 가질 역사 인식의 왜곡은 한국 사회의 미래를 위협하는 요소입니다. 최근 젊은 층에서 관찰되는 일부 극우화 현상은 결코 교육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교육이 바로 서야만 보편적 인권과 정의에 기반한 역사 인식이 확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과거사를 경시했던 박근혜 정부와, 새로운 관계 정립을 명분 삼아 왜곡된 역사 교육을 부추긴 윤석열 정부는 결국 국민적 저항과 ‘대통령 파면’이라는 불행한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이는 역사를 가벼이 여기는 권력의 결말이 어떠한지를 증명하는 엄중한 역사적 교훈이라 할 것입니다.



▶임: 앞으로 역사인문이미지연구소와 교수님 개인 연구에서 새롭게 추진하고 싶은 프로젝트나 목표가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신: 저의 오랜 고민은 늘 한가지였습니다. “수집한 자료를 어떻게 가치 있게 공유할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2019년 연구소를 설립했고, 방대한 이미지 자료를 데이터베이스(DB)화하는 작업에 매진해 왔습니다. 전근대와 근대를 아우르는 고지도, 사진그림엽서, 팸플릿, 우표, 그리고 해주구세요양원의 결핵 자료에 이르기까지, 제가 수집한 희귀 사료들을 체계적인 DB로 구축하는 것이 저의 소박하지만 원대한 꿈입니다.

새롭게 추진 중인 프로젝트는 ‘엽서로 재구성하는 한국 근대사’입니다. 대한제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사진그림엽서를 시대별로 정밀하게 분류하여, 시각 매체를 통해 우리 근대사를 입체적으로 복원해 보고자 합니다. 또한 결핵 홍보물, 전쟁사 이미지, 근대 우편사 및 철도·항만 자료 등 특정 테마별 DB 구축도 구상 중입니다.

이 모든 작업의 종착지는 ‘공공을 위한 기증’입니다. 소중한 역사 자료가 개인의 전유물로 남아 사장되거나 훼손되는 것을 막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강진하멜기념관’에는 ‘하멜보고서(하멜표류기)’ 초판 번역본 8종을 기증한 바가 있고, 최근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과 국립일제강제동원기념관 등에 독립공채 원본을 비롯해 희귀 팸플릿, 고서, 사진그림엽서 등 수백 점의 자료를 기증해 왔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역사는 독점될 때 왜곡되기 쉽지만, 공유될 때 비로소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힘을 갖기 때문입니다. 더 많은 이들이 이 자료들을 공유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역사관이 더욱 바로 서기를 바랍니다. 제가 가진 자료들이 그 올바른 역사를 정립하는 든든한 초석이 된다면, 연구자로서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일 것입니다. 임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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